놀이터

캐서린 | 2010.05.15 01:20 | 조회 4617 | 공감 27
놀이터에는 말 세마리가 서있다

서있다기보다는 바닥에 두꺼운
스프링 지지대가 있어서 그 위에 부자연스럽게 매달려 있다
말머리를 발로 뻥 차면 메트로놈처럼 무겁게
두세번 왔다갔다가 하다가 이윽고 중심에 서서 멈춘다

친구가 빌린돈을 갚겠다며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잔뜩 흉이 진 나무벤치는 여기 놀이터의 수명을 여실없이 보여준다
흉터를 감추려고 진초록 페인트를 덧칠했는데 그게 또 벗겨졌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바로 앞에 놓여진 세마리 말의 뒷모습을 본다
언젠가 저걸 타고 세찬 벌판을 가로지르는 상상을 하던 때가 있었는데..

놀이터에서 놀고있는 아이들은 없다
모두들 메이플 스토리인지 던전 뭐시기인지 게임에 정신쏟느라
놀이터는 한껏 한산할 시간이다, 아니면 원래부터 한산했던가
세마리 말들도 진짜로 치면 이미 현역을 은퇴해서
저 멀리 지방 동물원에 아무렇게나 부려져 있을 나이이다

어느새 나는 동정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머릿속에서는 말의 스프링 밑둥이 뽑혀나가
쓰레기차 뒷칸에 엎어져서
온갖음식찌꺼기와 뭐묻은 휴지들과 함께 버무려지는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가 타줄게!"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일어서서 가운데 말의 등을 쓰다듬는다
안장에 떼가 많이 묻었다, 코부분에는 할퀴어진 상처가 셀수없다

발을 지면에 대고 엉거주춤하게 말 위에 앉은채 앞뒤로 몸을 흔든다
적당히 힘이 실리면 잠시 발을 떼고 달리고 싶어하는 말의 몸가짐을 읽는다
세찬 벌판은 아니더라도 잡것 등속을 싣고
마을 어귀를 나가는 당나귀 정도는 될 것이다

그래, 마음껏 나아가거라, 또 모르지
물건이 많이 팔리면 주인이 너에게 시원한 무 한조각 씹어먹일지

그렇게 눈을 감고 이것저것 상상하고 있는데 뒤통수가 따갑다

친구놈이 흰봉투를 자켓 안주머니에 꺼내면서 나를 측은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뭐하냐?"

"응, 물건 팔러 간다"

"미친, 무슨 물건"

"몰라 임마"

흰봉투를 꿰매듯 낚아채고 나는 놀이터를 떠난다

놀이터를 디자인한 위인은 그걸 말이라고 결정하고 만든걸까
아니면 애초부터 당나귀를 염두에 두고 만든걸까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영락없는 당나귀다

그 모습이 나와 너무 비슷해보여서 돌아가는 중에도 두번 놀이터를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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