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힘내세요

elec | 2009.12.01 18:22 | 조회 5323 | 공감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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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버지는 철도공사(구. 철도청)에서 근무하고 계십니다.

아버지의 성격은 소심하신 편입니다. 나름 원칙은 있으시지만, 사람들 앞에 나서시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죠. 그래서 어울리는 분들도 그리 많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정말 친한분들한테는 인기가 많으세요. 친해지긴 어렵지만 일단 친해지면 평생가는 그런 스타일이시죠.

28년간 근무하시면서 참 일이 많았습니다. IMF터지고, 공무원에서 공사직원으로 신분이 바뀌면서 몇차례 구조조정도 있었지만 성실하시기 때문인지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일하고 계시죠. 벌써 정년이 몇 년 남지 않으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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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에 막 입학해서 학교에서 투쟁이 터져 나름 열심히 참여하고 있을 때, 아버지께서 저와 맥주를 드시면서 제게 하신 말씀이 있었죠. 아버지께서는 예전에 지역노조위원장을 하실 뻔한 적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김영삼 말기, 노동법 날치기 통과로 비정규직이 막 생기고 대투쟁이 시작될 그때 쯤이죠.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와, 그 당시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고 있던 저와 형을 보면서 그 제안을 뿌리칠 수 밖에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이해가 안되는 건 아니었지만, 안타까운 건 어쩔 수 없더군요.

그리고 시간이 흘러 저는 졸업을 앞둔 20대 중반(-_-)이 되었고 형은 다행히 좋은 회사에 취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0여년전 그때처럼 다시 철도노조는 파업을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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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제게 아버지께서 휴대폰을 주시며 통화를 녹음하려면 어떻게 하냐고 물어오셨습니다. 하나하나 가르쳐 드리고 나서, 왜 그러시냐고 여쭤보았습니다. 회사쪽에서 협박전화가 오면 녹음을 해야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매일같이 몇 통씩 회사에서 협박성, 회유성 문자가 날아옵니다. 어디에서는 노조원들이 다 파업풀고 복귀했으니까 너희들도 얼른 하라는 둥, 파업이 계속될 경우 손해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는 둥 하면서 말이죠. 아버지는 보지도 않고 삭제버튼을 누르십니다. 뭐 100%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신다면 거짓말이시겠지만. 그런데 아버지는 회사에 복귀할 생각이 없으시대요. 아버지는 이렇게 얘기하셨죠. '나야 너도 니 형도 다 잘 커서 걱정이 없다. 내가 이마당에 저놈들한테 비굴할 필요가 뭐가 있겠냐. 그리고 나같은 사람이 안하면 초등학교 중학교 자식들 있는 애들은 뭘 믿고 동참을 하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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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철도파업때문에 세상이 좀 시끄럽죠. 시민들 불편이 많네, 손실이 어마어마하네, 등따습고 배부른 귀족노조들이 파업하네 하면서 말이죠. 뭐 하나하나 반박하려면 다 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그런 얘기를 하려고 하는 건 아니니까 접어두고요. 한가지 분명한 건 아버지는 그들이 말하는 사람의 부류에 하나도 해당되지 않는다는 거죠. 아버지는 빨갱이도 아니고, 언론에서 보도하는 것만큼 봉급이 많지도 않고(내집마련하는데 15년이 걸렸습니다. 지방에서요.), 정치파업을 생각하실만큼 영악하신 분도 아니죠. 인터넷에서 파업에 관한 기사들을 볼 때마다 아버지를 떠올려보면 참 웃겨요. 우리 아버지가 저런 사람이었나 하고요. 그들에게는 우리 아버지가 대한민국의 선진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일텐데, 제가 아는 아버지는 그렇게 대단한 분인것 같지는 않거든요.

제가 태어나서 걷지도 못할 때라 잘 기억은 안나지만, 87년에 큰 투쟁이 하나 있었다죠. 책에서 봤는데, 그 투쟁이 있기 전과 있고 나서의 노동환경은 상당히 많이 바뀌었다더군요. 그리고 97년을 거쳐, 2009년이 되었고, 상당수의 공공기관이 민영화되거나 공기업로 바뀌었고, 또 바뀌고 있죠. 비정규직은 점점 늘어나 이제 곧 노동자의 대부분이 비정규직이 될 현실. 파업과 투쟁이라는 것은 항상 '좋지 않은'것이었지만, 이제는 그 말을 꺼내는 것 조차 죄악시되는 현실. 전자와 후자는 과연 무관할까요.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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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아버지께 배웠습니다. 아버지는 제게 있어 하나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저는 아버지만큼만 살면 후회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아빠. 힘내시구 이제 제걱정, 형걱정일랑 붙들어매시쥬.^^ 조만간 홍어삼합에 소주 먹으러 가게요. 홍어 못먹은지가 너무 오래된거 같은디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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