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달 호두과자

캐서린 | 2009.01.27 00:20 | 조회 4685 | 공감 29
언젠가 그녀는 말했다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드는 시간에 널 생각할게

하늘은 보랏빛을 지나 이미 사방에 짙은 어둠이 흩뿌려진 시간이었다.
한 칸짜리 고속버스 우등석에 반쯤 몸을 누이고 있던 나는,
바로 앞좌석에서 그녀의 전화통화 소리를 몰래 빨아들이면서 몸을 곧추세웠다.
사람들은 귀향길로 지친 몸을 일찍부터 불편한 잠자리에 맡기고 있었다.
그래서 차마 잠,이라고도 할 수 없는 기절과도 같은 무의식의 바다를 헤엄치고 있었다.
그녀와 나만이 고속버스 안에 채워진 바닷물 속에서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보라색 좋아하니? 나는 색깔 속에서 우유처럼 빛나는 달이 너무 좋아
보름달이든, 초승달이든 모양은 상관없어
다만, 사라지지도 완전히 나타나지도 않은 모습으로 항상 나를 바라봐주었으면 좋겠어

나는 스크린이 고장난 상영관 한켠에 앉은 관객처럼 머릿속이 헛헛했다.
좌석과 창가 사이로 여자의 긴머리가 살짝 드러났지만, 얼굴은 끝내 볼 수 없었다.
심심풀이로 먹는 팝콘처럼, 아까 휴게소에서 산 호두과자를 가방에서 꺼내 입에 물었다.

우리 헤어지자, 그래줄 수 있겠어?

그녀는 냉정과 침착함을 동시에 되새기려는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윽고 말을 꺼냈다.
나는 헤어지자는 말을 듣자마자 기겁하여 호두를 깨무려던 이를 멈추었다.
마치 내가 어떤 숭고한 의식이나 제사를 엿보아서 찬물을 끼얹는 것처럼
묘한 죄책감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좀 전 까지만 해도 전화기 너머로 새어나오던 둔탁한 저음이
어느 사이엔가부터 종적을 잃고 헤매기 시작했다.
상대방 역시 나처럼 기겁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이후에도 여자는 몇번의 되새김과 냉정과 숭고함이 깃든 말들을 꺼냈지만,
나는 갑작스럽게 밀려든 졸음 때문에 더이상 듣지 못하고
자신의 품위를 잃은채 미친듯이 잠에 빠져있는 귀향객들의 틈으로 편승해야만 했다.

버스가 남부터미널 앞에 사람들을 토해내기 직전에서야 나는 눈을 떴다.
아직 잠에 덜깨서 머리가 어지러운 가운데서도 나는 앞좌석의 여자를 눈으로 좇으려고했다.
하지만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하차하고 없는 뒤였다.

터미널의 사닥다리 같은 계단을 걸어 내려가면서 나는 호두과자를 씹었다.
이제 곧 동틀 무렵이어서 하늘은 보랏빛으로 환했는데,
그 속에서 올라오는 여명이 조용한 재즈음악의 선율을 내뿜었다.

여자는 아마 저녁이 아니라, 새벽의 보랏빛을 말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스름한 새벽에 너를 생각할게.
곧 없어질 달을 생각하면서 너를 찾아갈게.
난 잠시 헤어질게. 저녁이면 나타날 당신을 기대하며.

그렇게 짤막한 시 한수를 제멋대로 머릿속에 써갈겨놓고서,
나는 뭔가 쑥쓰러운 기분에 취해 온몸을 뒤흔들었다.

그러고 나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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