냐냐냐

캐서린 | 2009.01.30 13:40 | 조회 5154 | 공감 27
갓 태어난 고슴도치새끼 같이
부드럽지도 딱딱하지도 않은
털모자가 달린 땅콩색 코트를 입었어요 오늘

의정부로 향하는 지하철을 탔는데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승객들이 적더라구요

1호선으로 출근하거나 혹은 등교하거나
어찌됐든 정기적으로 네이비색 노선을 이용하시는 분들은
으레 지나치게 되는 할머니 한분이 계시죠

저는 그분은 '냐냐냐 할머니'라고 불러요

찬송가인지 아니면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잊혀진 대중가요 중 한 곡절인지를 부르시는데

허밍이라고 하기엔 발음이 너무나도 뚜렷하고
그렇다고 가수 윤종신처럼 신실한 발음을 구사하는 것도 아니어서
저는 그저 '저 할머니는 '냐냐냐' 노래부르신다' 해서 '냐냐냐'할머니라고 칭하죠

냐냐냐할머니는 껌을 파세요

가격은 1000원 이상, 초록색 자이리톨을 파시죠
가끔 쥬시후레쉬 같은 단물이 맛있는 껌을 파시기도 하는데 그런 경우는 드물어요
껌이 들어있는 케이스들의 케이스를 장바구니 같은 데 넣어서
질질 끌다시피 들고 다니시는데 당신의 작은 몸만큼 커보여서 안쓰러울 때가 많죠

하루는 냐냐냐할머니가 내 앞에 서시더니
예의 자이리톨 껌을 거세게 내미시면서 '냐냐냐'하셨어요
'냐냐냐'는 노래같지 않고 어떤 커뮤니케이션 수단 같았어요

"이 껌 좀 사주지 않으련? 1000원이란다"

내가 그분의 암호를 제대로 해석한 것인지,
아니면 자의적인 생각에서,
혹은 어떤 동정이나 빌어먹을 독심술에 의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저는 제 나름대로 팔을 교차시켜 반팔 길이의 엑스자를 만들어보였어요

"껌 사절"

제 암호를 풀이하면 대강 이런 뜻이었을거예요
하지만 할머니는 쉽게 물러서지 않으셨어요
껌을 물리치는 대신, '냐냐냐' 대신,
윤종신만큼이나 뚜렷하게 한마디를 하셨어요
너무나 뜻밖에 듣게되는 문명에 기댄 육성인지라,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녀의 말을 톨씨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럼 핸드폰 좀 빌려줘"

내 스스로도 너무 놀라서
교차시켰던 팔을 부리나케 풀어다가
주머니를 뒤적여 핸드폰을 찾아 넙죽 드렸죠

"응 여보, 일 끝났어, 밥은 먹었어? 알았어 지금 갈게"

그렇게 한마디 하고선 통화기록을 지운다음에
저에게 다시 돌려주셨어요

왠지 모르게 가슴 속 깊은 곳,
에이포 용지의 네 귀퉁이 끝과 맞먹을만한
제 내면의 후미진 곳에서 뜨거운 입김 같은게 용솟음쳤어요

항상 냐냐냐로 일관하시던 할머니가 사실은 윤종신이고
남편 분이 계시고 게다가 핸드폰 사용법에 해박하시다니

할머니가 내리신 청량리 역을 지나 회기, 그리고 신이문을 거치면서
저는 읽던 책을 무릎위에 놓고 설명하기 힘든 생각에 잠겨 한동안 빠져나올 수 없었어요

오늘도 할머니를 만났어요

종로 5가쯤에서였어요
저쪽 칸 문이 열리면서 예의 시장바구니가 보였죠
시장바구니는 감색이예요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암색도 아니라서
갑자기 쑥 들이밀면 주목하게 되는 색이죠

저는 당연히 그쪽을 쳐다봤고, 냐냐냐 소리가 없어도
당연히 그분이 '냐냐냐할머니'임을 직감했죠

왠지 모르게 두근두근 했어요

공포와 두려움이란 말과 통용되는 두근두근이 아니라,
학급에서 제일 미모가 뛰어난 여자애에게
막 고백을 하려는 찐따의 마음과도 같은 '두근두근'이었어요

할머니가 점점 제가 앉은 자리로 다가오시고 계셨죠
오늘따라 냐냐냐가 사랑의 세레나데처럼 감미롭게 들렸어요

저는 떨리는 심장을 두손으로 감싸 쥐면서 잠자코 앉아있었죠
할머니가 껌을 내밀면 이번에는 꼭 하나 사드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지갑 속에서 오천원짜리를 하나 꺼냈어요
하지만 이내 다시 집어넣고 가방 주머니에서 오백원짜리 두개를 만지작거렸죠

할머니와 제 사이는 일미터 남짓이었어요
저는 또다시 감정이 북받쳤어요
역시나 가슴 속 에이포 네 귀퉁이에서 불똥이 튀기 시작했구요

"껌 한통 주세요, 껌 한통 주세요, 껌 한통 주세요"

입 속에서 혀를 굴리면서 이 말을 몇번이나 연습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할머니는 제 좌석을 지나치지 않고
동대문 역에서 내리셨어요

모르겠어요

뭔가 바쁜 일이 있으셨나봐요
보통 회기나 청량리에서 내리시는데 말예요
혹시 남편분이 밥을 챙겨드시지 못해서 빨리 퇴근하셔야했던 건지
아니면 오늘따라 유난히, 요즘 경제도 나쁘니까 벌이가 시원찮았는지
어떤 이유가 됐든 제 자리를 지나치지 않으셔서 슬펐어요

살짝 그을린 내 마음속 에이포 네 귀퉁이를 살며시 매만지면서,

나는 창밖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눈으로만 좇을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기회를 빌어서, 여기에다가 한마디 적고 싶어요
이건 할머니께 바치는 내 마음의 편지이기도 하죠
26살이 되어서도 아직 풀리지 않는 '사랑'의 감정들을
글로 최대한 정확하게 표현해보라면, 아마도 이 편지글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그럼 시작할게요

냐냐냐 할머니께


냐냐냐 냐냐 냐 냐냐냐냐냐냐 냐냐 냐냐냐냐냐 냐냐냐냐냐냐

냐냐냐 냐냐냐냐냐냐냐 냐냐냐냐냔 냐냔 냐냐냐냐냐냐냐아아아

냐냐냐 냐 냐냐 냔 냐 냐냐냐 냐냐냐 냐냐냐냐냐냔 냐냐아아앙 냐냐냐

그럼 이만

캐서린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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