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
"내 이름을 여러번 되뇌이다보면
과연 내가 '정말 진짜 캐서린'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아닌게 아니라 내 이름을 여든 번 정도 반복할 때 쯤 되면
눈 앞에 젖빛의 선들이 모여 이루어진 사람 형체가 드러나는데,
두 눈을 비비고 찌푸려서 좀더 자세히 볼라치면 갑자기 사라진다
나는 언젠가부터 그를 '정말 진짜 캐서린'이라고 불렀다
정말 진짜 캐서린은 수줍음이 많았다 (이미 언급했다시피
그를 부르기 위해선 이름을 여든 번 이상 소리내야한다)
그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윤곽을 확연히 드러내지 않았으며,
'안녕'이나 하다못해 짧은 소리로 '여'라는 인삿말을 건네는 것조차 사치라고 생각했다
하루는 그가 먼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껍데기야, 껍데기야, 가짜 캐서린아"
나는 '가짜'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릴 새도 없었다
드디어 정말 진짜 캐서린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는 마음에
들떠서 뭐가 뭔지도 모르고 밝은 표정으로 '예, 주인님'하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의 허연 집게손가락을 들어 내 얼굴을 가리켰다
"내 얼굴을 돌려줘"
나는 아무말도 잇지 못하고 가만히 서있었다
"그건 원래 내 것이야, 가짜는 안돼, 진짜 자리로 와야지"
정말 진짜 캐서린이 내 얼굴에 손을 갖다대자
뺨 위의 피부가 부스스 조각나더니
민들레 홀씨처럼 허공 위로 흩뿌려졌다가 이내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깜짝 놀라서 손으로 얼굴을 만져보려고 했지만,
얼굴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얼굴이 있었던 자리에서 제일 가까운 목 언저리만 더듬거릴 수 있을 뿐이었다
정말 진짜 캐서린은 색깔이 뚜렷한 구릿빛 얼굴을 갖게 되었다,
몸을 이루는 희뿌연 연기 위에 얼굴만 둥둥 떠서 유령 같았다
"잘 돌려받았어, 그럼 이만"
정말 진짜 캐서린은 다음날 또 찾아와서
이번엔 다리를 돌려달라고 했다,
다음날의 다음날엔 가슴을,
다음날의 다음날의 다음날엔 손을 달라고 했다,
졸지에 가짜가 되어버린 나는 그의 일방적인 요구를 모두 들어주었다:
상황은 역전되었다, 내 온몸은 희뿌옇게 되어서
어디가 머리고 어디가 가슴이고
어디가 다리이며 어디가 손인지 알 수 없게 되었고,
정말 진짜 캐서린은 이전의 내 모습을
쏙 빼닮은 형체로 하나둘 수줍음을 지워가고 있었다,
이제 그는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한 번만 소리내어 불러도 어디서든지 금방 나타났으며,
'안녕'이나 '여'따위 대신
'안녕하십니까,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저는 캐서린입니다, 진짜 정말요'라는
비교적 긴 문장을 인삿말로 내뱉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이 부럽고 후회스러워서
고개 숙인 채 회한의 눈물을 흘렸지만 그것마저 형체가 없었다,
온몸을 빼앗긴 뒤부터 나는 말수가 줄어들었다,
엉망이 된 모습 때문에 밖을 나설 수가 없었고,
상대방이 이름을 수십번쯤 불러야 만날 용기가 생겨서
고개를 빼꼼 내밀 정도였다, 나는 순식간에 영락해졌다
어느날 정말 진짜 캐서린이 검은 수트에
진분홍 넥타이 차림으로 내 앞에 서서 말했다,
그 전에 나를 부르느라 이름을 오십번 정도 부른 뒤였다,
나는 그가 목이 탈까봐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들고 왔다
"껍데기가 정말 껍데기가 되었네"
정말 진짜 캐서린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서러움에 목이 매었다,
돌려줘, 돌려줘,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였지만
그는 혀만 끌끌 찰 뿐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수트 주머니에서 요란하게 울려대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와 웃으며 통화하더니 곧바로 집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허탈했다, 무엇인가(라고 말하기엔 너무나도 뚜렷하고 절실한 것)를
상실한 느낌에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식탁 의자 등받이를 잡고서 겨우 마루 쇼파위로 걸어가
막 몸을 뉘우려고 했을 때, 바닥에 메모 한장이 떨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거기엔 깨알같이 이렇게 씌여있었다:
"네가 껍데기라고 의심하지 말아라,
네가 정말 '껍데기'라면 일말의 감정조차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 아닌 '사물'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너에겐 슬픔이라는 감정들이 온몸을 휘감고 있지 않은가"
"너는 감정을 원동력으로 노력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시하는 손에 의존하지 말고, 나아가려는 발이 되지 말며,
얼굴로 아첨하거나 가슴으로 느끼려는 태도를 버리고
감정 그 자체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너는 비로소 껍데기가 아니라 알맹이가 되었고,
지금의 너는 충분히 자연스러워서 눈부실 뿐이다"
과연 내가 '정말 진짜 캐서린'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아닌게 아니라 내 이름을 여든 번 정도 반복할 때 쯤 되면
눈 앞에 젖빛의 선들이 모여 이루어진 사람 형체가 드러나는데,
두 눈을 비비고 찌푸려서 좀더 자세히 볼라치면 갑자기 사라진다
나는 언젠가부터 그를 '정말 진짜 캐서린'이라고 불렀다
정말 진짜 캐서린은 수줍음이 많았다 (이미 언급했다시피
그를 부르기 위해선 이름을 여든 번 이상 소리내야한다)
그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윤곽을 확연히 드러내지 않았으며,
'안녕'이나 하다못해 짧은 소리로 '여'라는 인삿말을 건네는 것조차 사치라고 생각했다
하루는 그가 먼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껍데기야, 껍데기야, 가짜 캐서린아"
나는 '가짜'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릴 새도 없었다
드디어 정말 진짜 캐서린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는 마음에
들떠서 뭐가 뭔지도 모르고 밝은 표정으로 '예, 주인님'하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의 허연 집게손가락을 들어 내 얼굴을 가리켰다
"내 얼굴을 돌려줘"
나는 아무말도 잇지 못하고 가만히 서있었다
"그건 원래 내 것이야, 가짜는 안돼, 진짜 자리로 와야지"
정말 진짜 캐서린이 내 얼굴에 손을 갖다대자
뺨 위의 피부가 부스스 조각나더니
민들레 홀씨처럼 허공 위로 흩뿌려졌다가 이내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깜짝 놀라서 손으로 얼굴을 만져보려고 했지만,
얼굴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얼굴이 있었던 자리에서 제일 가까운 목 언저리만 더듬거릴 수 있을 뿐이었다
정말 진짜 캐서린은 색깔이 뚜렷한 구릿빛 얼굴을 갖게 되었다,
몸을 이루는 희뿌연 연기 위에 얼굴만 둥둥 떠서 유령 같았다
"잘 돌려받았어, 그럼 이만"
정말 진짜 캐서린은 다음날 또 찾아와서
이번엔 다리를 돌려달라고 했다,
다음날의 다음날엔 가슴을,
다음날의 다음날의 다음날엔 손을 달라고 했다,
졸지에 가짜가 되어버린 나는 그의 일방적인 요구를 모두 들어주었다:
상황은 역전되었다, 내 온몸은 희뿌옇게 되어서
어디가 머리고 어디가 가슴이고
어디가 다리이며 어디가 손인지 알 수 없게 되었고,
정말 진짜 캐서린은 이전의 내 모습을
쏙 빼닮은 형체로 하나둘 수줍음을 지워가고 있었다,
이제 그는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한 번만 소리내어 불러도 어디서든지 금방 나타났으며,
'안녕'이나 '여'따위 대신
'안녕하십니까,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저는 캐서린입니다, 진짜 정말요'라는
비교적 긴 문장을 인삿말로 내뱉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이 부럽고 후회스러워서
고개 숙인 채 회한의 눈물을 흘렸지만 그것마저 형체가 없었다,
온몸을 빼앗긴 뒤부터 나는 말수가 줄어들었다,
엉망이 된 모습 때문에 밖을 나설 수가 없었고,
상대방이 이름을 수십번쯤 불러야 만날 용기가 생겨서
고개를 빼꼼 내밀 정도였다, 나는 순식간에 영락해졌다
어느날 정말 진짜 캐서린이 검은 수트에
진분홍 넥타이 차림으로 내 앞에 서서 말했다,
그 전에 나를 부르느라 이름을 오십번 정도 부른 뒤였다,
나는 그가 목이 탈까봐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들고 왔다
"껍데기가 정말 껍데기가 되었네"
정말 진짜 캐서린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서러움에 목이 매었다,
돌려줘, 돌려줘,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였지만
그는 혀만 끌끌 찰 뿐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수트 주머니에서 요란하게 울려대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와 웃으며 통화하더니 곧바로 집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허탈했다, 무엇인가(라고 말하기엔 너무나도 뚜렷하고 절실한 것)를
상실한 느낌에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식탁 의자 등받이를 잡고서 겨우 마루 쇼파위로 걸어가
막 몸을 뉘우려고 했을 때, 바닥에 메모 한장이 떨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거기엔 깨알같이 이렇게 씌여있었다:
"네가 껍데기라고 의심하지 말아라,
네가 정말 '껍데기'라면 일말의 감정조차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 아닌 '사물'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너에겐 슬픔이라는 감정들이 온몸을 휘감고 있지 않은가"
"너는 감정을 원동력으로 노력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시하는 손에 의존하지 말고, 나아가려는 발이 되지 말며,
얼굴로 아첨하거나 가슴으로 느끼려는 태도를 버리고
감정 그 자체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너는 비로소 껍데기가 아니라 알맹이가 되었고,
지금의 너는 충분히 자연스러워서 눈부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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