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퐁

캐서린 | 2008.10.20 00:46 | 조회 4068 | 공감 27

우리집에서 꽤 가깝고도 먼 거리에
'썬프라자'라는 중형 백화점이 하나 있다
지금은 이사해서 걸어서 5분이면 닿는 곳인데,
내가 어렸을 적 살던 동네에선 1시간 넘게 걸렸다

썬프라자 옥상엔 놀이공원이 있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당시에 그곳은
어린이들의 메카로 통하는 성스런 장소였다
우리들 사이에선 단 한문장으로 썬프라자의 의미가 통했다

우리 '퐁퐁' 타러 가지 않을래?

나는 아버지가 사다주신 과학관련 잡지를 통해
'퐁퐁'이 '트램블린'의 속어란 걸 이미 깨우치고 있었지만

8,9살의 나이에
우리 '트램블린' 타러 가지 않을래? 라고 묻는다면
왕따나 불행의 편지에 시달릴 것이란 걸 알고 있었기에
남들과 똑같이 '퐁퐁'이란 단어를 썼다

퐁퐁은 어린이들의 희망이었다

반짝거리고 물렁거리는 검은 천은
하늘로 인도하는 신비로운 대지였고
'퐁퐁'의 코너를 담당하는 종업원은
하늘로 올라가는 시간을 다스리는 하느님과도 같았다

'퐁퐁'을 타러 가는 날은 성지순례였다

나와 동료꼬맹이들은 썬프라자로 가는 길을
입맞춤하고 걷자고 작정하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것도 챙기지 않은 빈털터리의 옷차림으로 밖을 나섰다
당연히 전날 엄마에게서 타낸 꾸깃한 천원짜리 한장은
주머니에 고이 찔러 넣고서였다

지름길로 20분 걷자 도착한 유치원 계단 밑에서 잠시 쉬면서
앞으로 벌어질 퐁퐁의 위력에 대해 이야기했고
덤블링이라던지, 슈퍼점프라던지, 자신의 가능한 기술들을
고급딱지를 내보이는것처럼 자랑삼아 속삭이기도 했다

퐁퐁은 10분에 200원이었다

돈이 문제는 아니었다
퐁퐁을 기다리는 친구들의 대열에 늘어서서
짙어가는 석양 빛에 눈길을 흘려보내는 시간이 속상할뿐이었다


나는 그때 당시 눈시울을 적시던 나의 어떤 심경과
다음이 바로 우리차례였을 때 영업시간이 끝났다며
퐁퐁의 입구에 쇠자물쇠를 걸던 종업원아저씨의 야속함을 그녀에게 토로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정말 슬펐겠다
어쩜 그 어린나이에...

하지만 반응이란건 냉담한 것이었다

"우리 커피 마시지 않을래?"

그래서 우린 공원에서 제일 가까운 그린마트에서
티오피 빨간색과 초록색을 사다가 그녀의 집까지 가는 길을 걸으면서 마셨다

나는 사실 커피를 싫어했다

커피를 마시면 뼈가 삭는다고 옛날 옛적 엄마가 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엄마보다 그녀가 좋았으므로,
퐁퐁보다 그녀를 훨씬 더 사랑하므로

나는 커피를 원샷한다

그래, 오늘도 어딘가에선 퐁퐁이
꿈을 채우지 못한 어떤 어린 아이의 마음속을
퐁퐁거리며 뛰놀고 있겠지,

생각하면서 지하철을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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