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chell

캐서린 | 2008.10.09 02:48 | 조회 4389 | 공감 20
워크맨이 고장나서요, 어디서 고쳐야 되요?

그녀를 만난건 새벽의 지하철이었다
어둠에 드리워진, 새벽공기에 드리워진, 피곤함에 드리워진 터널을 지나면서였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트레이닝복 차림의 거나한 사내 둘이 노약자석에서
서로 어깨를 기대고 취한듯 자고 있었다
그뿐이었다

그녀는 분명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런 느낌이었다
대각선 너머 두 칸 멀리서 앉아 있는 내게,
쳐다도 보지 않고 말을 걸고 있었다

어디서 고치냐구요

그 문장은 곧대로 들려오지 않고 비비 꼬였다

"제가 미쳤는데 어느 정신병원으로 가야 머리를 고칠 수 있어요?"

워크맨은 AWIA였다
은색 버튼이 두툼하고 무게감 있어 보이는 게 90년대 초반에 나온 물건 같았다
그녀는 자꾸 플레이버튼과 스톱버튼을 번갈아 눌러댔다

가져와 보세요

나는 손을 내밀었다
대각선으로 두칸 넘어서였다

빨강과 검정의 줄무늬 스타킹이 발을 굴렀다
앉아있을 땐 몰랐는데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었다
그녀가 이어폰을 귀에서 빼낸 후 내게 건넸다

들어봐요 안 들려요

'내 머리를 때려보세요 텅텅거려요"

나는 플레이버튼을 누르고 나서
이어폰은 그대로 냅둔채 볼륨만 높였다

들리는 건 Beatles의 Michell 이었다

미셸, 내 사랑
사랑이란 아름다운 단어에 꼭 어울리는 미셸
미셸, 아름다운 내 사랑

음악은 더이상 이어지지 않고 간주부분만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그렇죠?

그녀는 게슴츠레한 눈을 그나마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노래가 좋네요"

그렇죠?

"고장난 것 같긴 해요, 워크맨"

그렇죠?

"워크맨, 오래된 것 같은데"

그렇죠?

"비틀즈가 오래된 밴드이긴 하지만"

그렇죠?

"새벽에 듣기 좋은 노래네요"

그렇죠?

그녀는 12시를 알리는 뻐꾸기 시계같았다
나는 워크맨을 손바닥으로 툭툭 쳐보기도 하고
뚜껑을 열어 내부를 입으로 살살 불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워크맨은 언제나 '고장'이었다

그 사이에도 지하철은 고요한 터널 안을 헤매듯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곧 내릴 차례였다, 대림역, 무미건조하고 휑한 공간

다음 구절을 듣고 싶어요

"그게 문제였나요?"

정말 그게 문제였다
그녀의 워크맨은 다음구절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판타지 영화처럼 봉인된 괴물의 해제를 어떻게든 막기 위한 것처럼말이다
아니, 워크맨보다는 다음구절을 비정상적으로 원하는 그녀의 모습이 더 기괴한 게 아닐까
이상한 워크맨의 이상한 주인이다, 라고 나는 잠시 생각했다

왜일까, 라는 의문은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나는 그녀에게 대답했다
Beatles의 노래라면 유명한 노래의 가사는 대충 외우고 있었으니까

내가 노래하듯 흥얼거렸다

"다음 구절은 아마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일거예요"

그러자 여자의 얼굴은 수학문제의 해답지가 됐다
명쾌한 풀이가 그녀의 머릿속에 희석되면서 눈물이 되어 흘렀다

고마워요

줄무늬 스타킹이 흔들리는 무릎을 꿇었다

지하철이 흘러갔다
내가 내릴 지점을 한참 지나버려서
이제는 정처모를 어딘가를 느릿느릿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생소한 이름의 어떤 역에서 내려버렸다
울먹이는 그녀를 버려두고,
상처가 된 그녀의 문장을 입으로 흥얼거리면서.
공감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22,450개(37/1123페이지)
RHkorea : 자게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21730 그랜드민트19일 가요..ㅜㅜ우헤헿.. [6] 뭇담 3898 2008.10.13 00:34
21729 서버 접속 장애 안내 [2] 우호 4344 2008.10.12 11:52
21728 서버 장애 공지 [5] 우호 4242 2008.10.09 21:55
>> Michell [4] 캐서린 4390 2008.10.09 02:48
21726 해피 [7] 스캇 4241 2008.10.08 14:31
21725 칸 국제광고제 수상작 중에 Radiohead의 노래가... [4] 철천야차 6982 2008.10.08 10:33
21724 오랫만에 잠깐 기웃거리고 갑니다. [2] coma 3946 2008.10.08 00:37
21723 뽀로로 [6] 이보람 4181 2008.10.06 21:35
21722 지뢰찾기 전격 영화화! [13] Sartre 4075 2008.10.06 02:20
21721 일본 공연 못 가신 분들 이거라도... [9] PlasticLove 4606 2008.10.05 13:39
21720 에드 사진 첨부파일 [6] 김형석 3984 2008.10.05 12:58
21719 악님. [4] 차차 4457 2008.10.04 12:28
21718 이케부쿠로에서 사이타마슈퍼아레나 어떻게 가나요? [3] c 4220 2008.10.03 23:00
21717  할로, 여기는 옥스포드~ [10] 나나 4146 2008.10.03 02:50
21716 하하하 [2] 네눈을줘 4061 2008.10.02 23:40
21715 동안이 대세... 사진 [1] 아기사자 3708 2008.10.01 10:05
21714 과연 무슨생각으로.....ㅡ,.ㅡ [4] 아기사자 3660 2008.10.01 10:04
21713 오늘 오전 수원 성대앞 참조은정형외과 [4] 악!! 4978 2008.09.30 17:57
21712 후드티;;;; [2] ramirez 3949 2008.09.29 13:13
21711 크립의 다른느낌 [6] 밤송이 3989 2008.09.28 13:48
일반 로그인
소셜 로그인
아이디/비번 기억
소셜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서 로그인하시면 별도의 로그인 절차없이 회원서비스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많이 본 글
댓글 많은 글
추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