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소설 2탄] Creep - Radiohead

Beatlebum | 2001.04.21 15:25 | 조회 2038 | 공감 6889
Creep - Radiohead


4월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그보다 더 나쁠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나쁜 일들이 생겼었다. 하나는 5년이나 사귀어 오던 애인과 헤어진 일이고, 또 하나는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물론 둘 다 납득하기 힘든 상황은 아니었다. 여자친구와는 5년이나 사귀었지만 매일같이 싸웠고 결혼 얘기가 나오면 미적거렸기 때문에 언젠가는 이런 상황이 오지 않을까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경우도 항상 온 가족이 조바심을 내던 터였다. 증권회사 부장이던 아버지는 매일 새벽에 출근해서 밤 10시까지 컴퓨터를 두드리고 일이 끝나면 자의반 타의반으로 거래처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말도 안되는 생활을 8년씩이나 계속해 오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 갑자기 쓰러져 죽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몸상태였다. 어머니는 거의 사흘낮 밤을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고 멍한채로 지새웠고,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주식투자에 한창이었는데, 그 주식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폭락하는 바람에 약간 남아있던 재산마저 공중으로 날아가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과 거의 동시에 여자친구는 헤어지자는 말을 전해왔다. '미안하지만'이라며 그녀는 말했었다.

"아버지 돌아가신 건 정말 마음아프게 생각해. 친딸처럼 잘 대해주셨던 분이니까. 그리고 아직도 너를 좋아하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야. 하지만, 난 이제 스물 세 살이고, 이런 식으로 하루하루를 흘려보내고 싶지는 않아. 나한테는, 너와는 다른 뭔가 절실한 어떤 것이 간절하게 필요해. 너는 그런 것을 여지껏 나에게 보여주지 못했고, 앞으로도 보여줄 거라고 생각지는 않아. 정말 미안해. 친구로 지내자는 얘기도 하지 않을께. 그냥, 앞으로 보는 일 없도록 하자. 그게 좋겠어."

여자친구는 마치 대본을 읽듯이(그러고보니 그녀는 연극영화를 공부하고 있었다) 일사천리로 그런 멜로드라마의 일부분 같은 이야기를 건네고는 카페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나는 그 자리에서 진저에일 세 잔을 마시고, 자동차를 몰고 외곽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다시 집 근처로 돌아와 맥주와 소주와 위스키를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진탕 마시고, 다음날 오후가 되서야 깨어났다. 눈을 떠보니, 어머니가 내 곁에 앉아 계셨다.

"엄마.."

목 안에 이물질이 가득찬 듯한 느낌이 들어, 제대로 말을 하기가 힘들었다.

"... 힘들구나..."

어머니는 그 말 한마디만 하시고는 밖으로 나가셨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뒤따라 갔지만, 어머니는 안방 문을 걸어잠그고 이틀간 밖으로 나오지 않으셨다. 조금 후에 알 게 된 사실이지만, 아버지의 친구 보증을 섰던 문제마저 터져 버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 집은 한발자국도 뒤로 물러설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나에게는 그런 사태를 해결할 만한 힘이 조금도 갖춰져 있지 않았다. 나는 온실 속에서 적당한 온도와 습기와 영양분을 공급받으며 자라온 미약한 존재였다. 스스로 무언가를 시도하고 이루어본 적도 없고, 손수 먹을 것 조차 만들어 본 적이 없는 어린아이었다. 군대까지 갔다온 스물 다섯 살 짜리가 집안 가득한 문제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해결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나라는 존재가 희미하게 옅어져 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란 놈은 뭐냐, 뭐하며 여지껏 살아온 거냐, 쓰레기다, 쓰레기야, 그런 생각들이 머릿 속에 가득했다. 지금이나 할 수 있는 얘기지만, 스스로를 무가치하다고 인정해 버리는 인간은 뒤로 물러날 여유조차도 잃게 되고 만다. 앞으로 전진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뒤로 물러나는 방법을 택하는 수밖에는 없는 법인데, 그것조차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리에 멈춰서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스스로를 파괴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내가 바로 그랬다. 나는 그 길로 예전에 알고 지내던 친구가 사는, 베를린으로 갈 준비를 시작했다. 2주일 뒤, 어머니에게는 미안하다는 말만 전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표정이란 것 자체가 깨끗이 없어져 있었다. 인형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나로서는 내 입에서 나온 미안하다는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조차 분간되지 않았다. 아마 아무런 마음의 가책도 없는 상태였을 것이다. 어머니가 울면서 붙잡았다면 곁에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아무튼 나는 나 자신을 아주 안쓰럽게 여기고 있었다. 어머니보다도 더 동정받아야 할 사람은 나라고 생각했다. 비행기 안에서는 조니 할리데이의 흘러간 노래가 계속 흘러나왔다.

태호는 나를 반겨주었다. 그간 있었던 미저러블한 사태들을 술을 마시며 샅샅히 이야기해 주었고, 태호는 나를 진심으로 동정하는 듯 했다.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스스로를 동정해 버린 인간은 남도 자신을 동정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끝장났음'을 의미한다. 그런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고 만다.

태호는 집에서 부쳐오는 돈으로 밤마다 클럽을 쏘다니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금전적으로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클럽에서는 밤마다 레이크 파티가 벌어졌고, 드럼두프가 둥둥둥 심장 박동을 멋대로 거스르는 가운데서 엑스터시의 향연이 펼쳐졌다. 10대 중반으로 보이는 파란 눈의 여자애들이 우리에게 가까이 와서 엑스터시 몇 알 사지 않겠느냐고 물으면, 돈을 건네주고 거래가 성립된다. 그 다음은 꿈속과도 같은 몽환 속에서 몇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식의 생활은 내가 독일에 도착한 첫날부터 2주나 계속되었다. 집에 한번 전화를 건 적이 있었다.

"여보세요?"

엄마의 목소리였다.

"...나예요.. 엄마.."

"...정환이니?.. 정환아.."

엄마의 목소리가 조금 변한 것처럼 생각되었다. 전화선으로 걸러진 목소리여서인지도 모르고, 충격으로 목소리 자체가 바뀌어 버린 건지도 몰랐다. 아니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해져온 목소리여서 그렇게 여겨진 것인지도 모른다.

"엄마.. 괜찮아요???"

"응, 정환아. 그 친구네 집에 있는거니??"

"예, 유학 온 친구네 집이예요. 태호라고."

"그래, 밥은 잘 먹고 있는거지? 굶거나 하는 거 아니지?"

"엄마는?"

"..엄마는 괜찮아. 엄마 말이지, 엄마 얼마전부터 일 시작했다, 정환아. 동네에 새로 생긴 갈비집이 있는데, 거기 나가고 있어. 일하는 것도 재미있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다 잘해줘. 정환아, 그런데 언제까지 거기 있을거니? 엄마는 정환이가 많이 보고 싶은데... 언제 올거니? 정환아.."

나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전날 두알이나 한꺼번에 삼킨 엑스터시의 약발이 아직 남아있었다. 머릿 속에서 하나의 영상이 빙빙 회전하고 있었다. 앞치마를 두르고, 갈비를 가위로 자르는 엄마의 모습이었다. 엄마는 갈비를 자르고 접시를 나르며,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표정은 웃고 있는데, 미소띈 눈에서는 눈물이 계속 흘러내리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 위로 여자친구의 얼굴이 겹쳐졌다. 두 개의 영상은 멋대로 겹쳐지고 회전하고 묘한 형상으로 변화하기를 계속하다가 필름이 멈추듯 뚝 끊어져 버렸다. 그리고 나는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태호는 어딘가로 나가고 없었다. 잠들기 전부터 계속 굶은 상태였기 때문에 몹시도 배가 고팠다. 나는 냉장고를 뒤져 보았지만, 내 손으로 요리 가능한 음식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냉장고에는 음식이라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태호는 대체 무얼 어떻게 해먹고 살아왔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처참하게 텅 빈 냉장고였다. 나는 찬장을 뒤져 유통기한이 불분명한 라면 한 봉지를 찾아냈다. 외국에서 라면을 발견했다는 것이 묘한 감각을 불러 일으켰다. 나는 조리예를 자세히 살펴본 뒤, 냄비에 물을 붓고 강한 불에 끓였다. 냄비도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서 10분여를 찾아다녀야 했다.

물이 끓자, 면을 냄비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스프를 털어넣는데, 불이 너무 강했는지 물이 넘쳐서 내 발등으로 떨어졌다. 깜짝 놀란 나는 손으로 잡고 있던 냄비마저 엎어 버리고 말았다. 발등을 더운 물에 데였는데도, 아프다는 감각은 없었다. 나는 엎질러진 면과 바닥에 흥건한 물자국 위에 몸을 웅크리고 한참을 울었다. 그 때, 태호가 집에 돌아왔다. 태호는 또 엑스터시를 했는지 동공이 확대되어 있었다. 태호는 나를 보고는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정환아, 우냐? 울어? 왜 울지? 울지 말고, 우리 춤이나 추러 가자. 아까도 신나게 한탕 하고 왔다구, 하하, 하."

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태호는 혼자서 거실 한가운데 서서 몸을 마구 흔들었다. 그러더니, '음악이 없잖아@f0'하며 라디오로 다가가 스위치를 켰다. 라디오에서는 정체불명의 트랜스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태호는 실실 웃으며 온몸을 마구 흔들었다. '정환이 너도 이리와'라고 말하기도 했다.

트랜스 음악이 끝나자, 전혀 다른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기타가 낮게 깔리는 느린 템포의 전주로 시작되는 곡이었다. 나는 그 곡의 제목을 떠올려보려고 애썼다. 눈물을 닦고, 벌개진 발을 손으로 문지르는 동안에 제목이 떠올랐다. 래디오헤드의 'Creep'이었다. 태호는 '뭐야, 이건@f1'하고 소리지르며 주파수를 바꾸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태호에게 그대로 내 버려 두라고 말했다. 태호는 멍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는, 침대가 있는 방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두 팔이 축 늘어져 있었다. 세 알을 한꺼번에 삼키면 저 정도가 된다. 네알을 삼키면 죽을 수도 있는게 엑스터시다.

예전에 아마추어 밴드 시절 끝도 없이 카피하려고 했던 곡이 바로 'Creep'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크립은 똑같이 연주할 수 없었다. 기타를 맡은 친구는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곤 했다. "이 곡은 대체 어떻게 녹음된 걸까, 모르겠어. 특별히 테크닉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기타 삑사리가 흉내낼 수 없는 부분도 아닌데, 카피가 안 된단 말야.."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크립을 따라부르고 있었다. 'I'm a Creep'하는 부분에서는 심장이 갓 낚은 연어처럼 파다닥 튀어오르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전율을 느꼈다. 기타가 잔뜩 일그러진 소리를 내는 순간에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표정은 입을 헤 벌리고 웃고 있는데, 눈물은 '그냥' 흘러내리는 내 모습을 누군가가 보았다면 분명 미쳤다고 단정지었을, 그런 모습이었다. 순간, 어머니도 그런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서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가 없다고 여자친구는 말했었다. 나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더이상은 스스로를 동정하지 않았다. 탐 요크의 목소리 속에 그 해답이 있었다. 일그러진 기타 사운드에 그 해답이 있었다. 탐 요크는 나에게 충고를 건네고 있었다. 동정하지 말아라, 쓰레기라고 자책하지도 말아라, 가사와는 전혀 반대로 그의 목소리는 나에게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아무리 실제로 자신이 쓰레기라도 스스로는 그렇게 단정짓지 말아라, 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찌그러진 기타음은 나란 인간의 상태를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태호는 침대에 누워 허공을 바라보며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떠나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떻게든 상황과 맞부딪쳐야 한다, 그것만이 쓰레기가 되지 않는 길이다, 라고 생각하며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막 일을 마치고 돌아오셨는지 않방에서 다리를 주무르며 TV를 보고 계셨다. 나는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용서를 구했지만, 어머니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으셨다. 나는 말없이 어머니의 방에서 나오면서, 어머니에게도 Creep을 들려 드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더라도, 앞으로 나갈 가능성은 있다는 사실을 함께 공유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내 방으로 향했다.

Creep에는 래디오헤드의 의도와는 관계없는 신기한 힘이 있다. 그것은, 인간 쓰레기로서 자신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인정하지 않는 방법에 대해 깨우쳐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엑스터시와 화상과 두 여자의 영상이 뒤섞인 한가운데서 그것을 몸서리치게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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