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디오헤드 시리즈 마지막] Exit Music - RadioHead

Beatlebum | 2001.04.28 23:15 | 조회 2270 | 공감 7074
Exit Music - RadioHead
http://imazine.hihome.com


로미는 거울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빗어내리고, 옷 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집을 나섰다. 늦어도 9시에는 직장에 도착해야만 했다. 로미는 약국에 다니고 있었는데,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매일같이 출근했다. 일요일에는 격주로 휴일이 주어졌다. 공휴일은 무조건 쉬도록 되어 있었다. 월급은 나름대로 많이 나오는 편이었고 -아마 어지간한 경리 일보다는 많은 보수가 주어지리라- 직장 동료들도 다들 괜찮은 사람들이라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2주에 한번씩은 전체 회식이 있었고 보통 한번 술을 마시면 3차까지는 이어졌다. 로미는 21세의 젊은 여자치고는 술을 잘 마시는 편이어서, 항상 마지막까지 남아 사람들을 택시에 태워 보내기도 하고, 클럽이 문을 닫을 때까지 신나게 놀기도 했다. 다음날에도 출근하는데는 별다른 무리가 없었다. 아무튼 젊었던 것이다. 하루만 무리해도 다음날 끙끙대는 26살의 언니들과 그녀는 달랐다. 아무리 과음한 다음날도 그녀는 끄떡없이, 생글생글 웃는 모습으로 직장에 나타났다.

로미에게는 4년간 사귄 애인이 있었다. 애인은 고교시절부터 사귀던 남자였는데, 대학생이었고 키가 로미보다 15센티 정도는 더 컸다. 로미도 여자치고 작은 편은 아니었는데 남자친구 옆에 서면 로미의 키가 턱없이 작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남자친구는 인상이 부드럽고 영화배우 존 쿠잭을 닮은 체격이 좋은 사람이었다. 둘은 평일에는 거의 만나지 못했지만, 로미가 쉬는 날에는 함께 영화를 보거나, 드라이브를 하거나, 다른 연인들이 하듯이 여행을 다녀오는 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남자친구가 군대에 가더라도 로미는 기다리겠다는 다짐을 수도 없이 했었다. 정말로 그럴 생각이었던 것이다. 남자친구와는 아직 키스 정도밖에는 하지 않았지만 -그런 로미에게 다른 친구들은 촌스럽다, 조선시대다 라는 얘기들을 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로미는 그에게 아주 강한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애정이나 호감과는 또 다른, 특별한 감정이었다. 로미는 그가 이성으로뿐만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마음에 들었고,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와 함께 자는 것 쯤은 별 무리한 일도 아니었지만 -실은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하루빨리 그런 날이 오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왠지 좀 더 기다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느 선을 넘어가는 행동은 주의하려고 노력해 왔다. 남자친구도 그런 로미에 대해 깊은 신뢰감을 보였고, '넌 다른 여자와는 달라'라는 얘기를 수도없이 되풀이해 말하곤 했다. 로미는 언젠가는 그와 결혼할 생각이었다.

로미의 가정은 아주 부유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자식 등록금 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형편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통신 회사의 부장으로 안정적인 수입을 오랜 기간 거둬들이고 있었고, 어머니는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클래식 음악을 듣는 그 나이답지 않은 중년여자였다. 이웃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교양있고 예의있는 사람들이라는 평을 받는 부부였다. 부모는 로미에게 많은 애정을 쏟았고, 로미도 부모의 사랑에 부족함을 느끼거나 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로미 위로는 오빠가 하나 있었는데, 결혼 후 바로 미국으로 출장을 떠나서 한 집에 살지는 않았다. 오빠와도 어린 시절부터 사이좋게 지내왔고, 결혼한 후에도 계속 편지를 주고받고 전화 통화를 하며 의좋은 남매 관계를 유지해 왔다. 누가 봐도 화목하고 건강한 가정이었다. 가정의 행복과 화목함이 죽은 말이 되어 버린 시대인데도 로미의 가정은 그 어느 집보다도 행복했다. 가족간의 불화나 증오, 시기 따위는 로미의 가정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듯이 보였다. 집에 들어가기 싫다거나 부모와 얘기하기 싫다거나 한 적이 로미에게는 한번도 없었다. 사춘기에 초경을 했을 때도, 좋아하는 남학생이 생겼을 때도, 남자친구와 키스를 했을 때도 부모와 고민을 상의했다. 부모가 주말마다 나가는 성당에도 빠지지 않고 함께 참석하곤 했다. 로미는 가족끼리 떠나는 여행이 너무도 즐거웠고, 휴가가 주어지기 한참 전부터 부모를 졸라 어디로 가족끼리 떠날지를 밤새워 고민하곤 했다.

로미가 대학진학을 포기했을 때도, 부모는 아무런 불만도 표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한 결정이라며, 일찍 사회에 나가서 부딪히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는 격려를 베풀어 주었다. 로미는 성적이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대학이라는 체계에 길들여지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일찍 결혼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대학에 가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 대신 로미는 고교 졸업과 동시에 취직을 했다. 처음에는 통신기기 대리점에서 일했고, 그 다음에는 홍대에 자리한 카페에서 근무했다. 그리고 나서 얻은 직장이 지금 다니는 약국이었다. 약국은 종로에 있었는데, 로미는 특유의 생긋생긋 웃는 얼굴과 예쁜 목소리로 간단하게 취직에 성공했다. 로미는 늘 그런 식이었다. 그녀가 웃으면 모든 사람들이 따라 웃었다. 나쁜 감정도 좀처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고, 별로 맘에 들지 않는 사람과도 재미있게 얘기할 줄 아는, 다소 특별한 능력을 타고난 여자였다. 얼굴이 아주 예쁘다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만하면 됐다, 싶을 정도로 인상은 아주 좋았고 피부도 깨끗했다. 특히 눈매가 짙고 예뻐서 그녀가 눈을 찡긋 하거나 크게 뜨거나 살짝 감는 정도에 따라서 다양한 표정과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로미에게도 고교시절까지는 따로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꾸미고, 배열하는 일에 소질을 갖고 있었는데 그래서 고교시절까지는 디자이너나 인테리어를 전공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실제로 두세달 정도 디자인 공부를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고 남자친구를 만나거나 가수의 콘서트에 가서 열광하거나 친구들과 모여 수다를 떠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디자인 공부를 하려던 계획을 시들시들해졌고, 왠지 속편하게 적당한 직장을 다니다가 결혼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더 낫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어서 전부다 그만두었다. 그녀는 얌전히 고교를 졸업했고, 직장을 세 번 옮겼고, 남자친구를 여전히 만났고, 비슷비슷한 하루하루를 반복하며 그 속에서 행복을 느꼈다. 디자인이나 인테리어에 대한 관심은 오래전에 사라져 버린지 오래였다.

그녀의 일과는 단순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고, 식사를 한 뒤 한시간 동안 공들여 화장을 하고 머리손질을 했다. 매니큐어나 페디큐어까지 했다면 더더욱 많은 시간이 걸렸을 테지만, 그녀는 네일아트 쪽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날마다 다른 옷을 어떻게 예쁘게 입고 나서느냐, 새로 나온 트윈 케이크와 아이섀도를 어떻게 사용하느냐, 머리를 묶을까 풀까 하는 생각과 그 생각을 실행하는데 한시간을 바쳤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집을 나서서, 직장에 도착하고 동료들에게 인사를 건넨뒤 오전 내내 분주하게 처방전에 따라 약을 내준다. 그리고 점심식사를 하고 커피를 한 잔 마신 뒤, 오후에도 오전과 같은 식으로 근무를 마치고 시내로 들러 옷구경을 하거나 악세사리를 사거나 미용실에 들르거나 하다가 9시가 되면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쉬는 날에는 남자친구와 하루 종일 함께 보냈다. 차를 마시고 영화를 보고 교외로 나가고 식사를 하고 함께 거리를 걷는 식의 데이트였다. 그리곤 집 앞에서 '잘 가'하고 헤어진다. 늘 그런 식이었다. 때로는 어제 벌어진 일이 몇 년전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오늘 있었던 일이 먼 나중에 있을 일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친절하고, 직장은 안정되고, 남자친구는 따뜻하고, 부모는 애정에 넘치고, 이승환은 매년 새로운 노래를 발표하고, 이정재가 출연한 영화는 석달에 한번씩 나왔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예쁜 옷들이 매장 쇼윈도 앞을 가득 메웠고, 오색찬란한 립스틱과 아이섀도의 신제품이 두달 주기로 시중에 나왔고, 가끔씩은 남자친구가 꾸찌나 프라다의 제품을 선물하기도 했다. 뭔가가 부족하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이 로미에게는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로미는 퇴근하는 길에 오래전 알고 지내던 친구를 만났다. 거의 6년 전이던가, 중학 시절에 매일 붙어다니던 혜리라는 여자애였는데 눈을 조금 고쳤는지 예전보다 훨씬 예뻐져 있었다. 로미는 얼굴에 칼을 대지 않았기 때문에 성형을 한 다른 여자들을 보면 부럽다는 생각부터 들곤 했다. 로미는 다른 곳에는 불만이 없었지만, 코가 약간만 더 높았으면 어떨까 하는 바램이 마음 속 가득했기 때문에 중학 시절 친구의 예뻐진 얼굴은 그녀의 코에 대한 잠재적 욕구를 되살려내기 충분했다. 혜리는 손을 흔들며, '반가워, 로미'하고 말했다. 둘은 가까운 곳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에서는 키스 자렛의 노래가 흐르고 있었는데, 로미는 창가 자리로 가서 앉았다. 혜리는 화장실부터 들렀다가 테이블로 왔다. 둘은 커피를 주문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할 얘기의 소재는 무궁무진했다. 둘은 남자친구의 얘기서부터 고교시절엔 무엇을 하고 지냈나, 아직도 이승환을 좋아하는가, 부모님은 건강하신가에 이르기까지 온갖 대화를 다 나누었다. 그러다, 직장 얘기를 하게 되었다.

"혜리 너는 어렸을 때, 나랑 같이 디자인 같은 거 관심 있었잖아, 그지?"

"그래. 그러니까 프랑스도 다녀왔지."

"그랬어?"

로미는 조금은 놀라고 있었다. 혜리가 그냥 직장인이나 대학생으로 지내지 않았다는 사실이 다소 의외였다. 실은 가끔 혜리 생각을 할 때마다 대학을 다니거나 보통의 회사에 다니고 있겠지, 라고 생각해 왔던 터였다. 중학시절 로미는 이거저것 재주가 많고 리더쉽도 있는 편이었지만, 혜리는 약간은 소심한 편에다 별다른 재능도 없는 것처럼 보였었다. 디자인에도 관심은 있었지만, 로미의 눈에는 그것이 단순한 관심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재능의 싹이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었다. 로미가 무언가를 그리거나 만들어 내면 늘 칭찬을 받았지만, 혜리의 것은 무시되기 일쑤였다. 그래도 혜리는 '난 패션 디자인이 꿈이야'란 말을 입에 달고 다녔었다.

"의상 디자인을 공부하다가, 작년 중순에 교수 초청으로 파리 쪽에 몇 달 다녀왔어. 졸업하면 의상실에 들어가 일하게 될 것 같아."

혜리는 그렇게 얘기하며, 로미를 향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로미는 잘 됐구나, 라고 말하며 마찬가지로 미소지었다. 둘은 한 시간 정도 더 얘기를 나눈 뒤, 연락처를 교환하고 헤어졌다. 혜리는 학생치고는 아주 인정받는 축에 드는 것 같았다. 교수가 연 쇼에서도 특별히 혜리의 작품이 몇몇 소개되었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에 로미는 슬프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고교 시절에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에 사로잡혀 버렸다. 혜리의 예쁜 미소가 마치 자신을 향한 빈정거림처럼 느껴졌고, 자신의 표정이, 그 어색한 웃음이 혜리에게는 어떻게 비쳐질 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로미는 힘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남자친구에게서 전화가 왔지만 피곤하다고 말하고는 끊어 버렸다. 침대에 드러누워, 한참동안 천장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화장대 옆에 자리한 라디오를 틀었다. 브랜포드 마샬리스의 연주가 페이드 아웃 되고,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린 템포의 기타 연주가 흘러나왔다. 곧 남자 보컬의 목소리도 들렸다. 탐 요크의 목소리였다. 멍한 느낌의 멜로디, 툭툭 던지는 듯한 기타 반주, 'Exit Music'이었다. 그 노래는 예전에 남자친구와 극장에 가서 들은 적이 있었다. 영화는 로미오와 줄리엣이었고, 두 연인이 쓰러진 모습 바로 다음에 흘러나왔었다. 이미 영화가 끝나서 자막이 올라가는 상황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그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했다. 로미도 그냥 일어서려다가 곧 그것이 탐 요크의 목소리임을 알아채고는, 엔딩 크래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그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사람들은 노래가 래디오헤드건 엔리께 이글레시아스건 상관없다는 듯이 다들 바쁘게 밖으로 빠져나갔다. 노래가 끝났을 때, 극장 안에는 단 세명만이 남아 있었다. 로미와 남자친구와, 맨 뒤에 앉은 20대 초반의 긴 머리 남자였다. 남자는 눈을 손으로 가리고 있었는데, 손 틈으로 눈물이 줄줄 흐르는 것이 보였다. 실은 로미의 눈에도 눈물이 약간 맺혀 있었다. 줄리엣이 죽는 장면과 탐 요크의 어지러운 목소리가 겹쳐지면서 뭔지 모르게 우울하고 히스테릭한 기분이 되었고, 남자친구가 옆에서 안쓰러운 듯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자 그만 말릴 새도 없이 눈물이 줄줄 흘러내려 버렸다. 영화가 다 끝난 극장 안에서 여자 하나와 남자 하나가 울고 있는 모습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심히 괴이한 광경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슬픈 영화이길래, 하는 기대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모습이었다.

로미는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잔잔하던 기타 연주에 갑작스레 드럼이 가세하고, 강제로 만들어낸 듯한 징-하는 잡음이 섞이고, 탐 요크가 울부짖기 시작하면서 로미의 머릿 속에는 스스로 숨을 끊던 줄리엣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머릿 속 가득 실 같은 것이 엉켜 요동치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특히 기타에서 나는 잡음은 지속적으로 로미의 정신에 타격을 가했다. 로미는 이런저런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오늘 만난 혜리의 웃음과, 중학 시절 자신이 그린 그림들과, 예쁜 옷과, 약국과, 지하철과, 오빠와, 남자친구의 혀의 감촉과, 에스쁘아 향수와, 구찌 핸드백과, 그런 많은 것들을. 그 순간, 탐 요크가 가녀린 소리로 중얼거렸다. 곡이 끝나고 CM이 흘러나왔지만 로미는 여전히 자신의 귀에 Exit Music이 흘러나오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예전에도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자뷰 같은 현상이었다. 언제였더라, 바로 극장에서였다. 긴 머리의 울고 있는 남자는 등에 기타를 메고 있었는데,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혼자 뒷자리에 남아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영화가 슬퍼서 그랬다면 오래전에 울음을 그쳤을 것이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엔드 크레딧의 음악 뿐이었다. 저 남자도 줄리엣의 마지막 표정을 떠올리고 있는 걸까, 하고 로미는 생각했었다. 그리고 머리속이 한껏 복잡해진 상태로 집에 돌아갈 때까지 남자친구와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있었다.

그 남자는 출구를 찾았을까, 아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라고 로미는 생각했다. 출구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어디로도 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런 눈물을 극장에서 흘려야만 했던 것이다. 혜리는 어떨까. 그렇다. 그녀의 그런 웃음을 출구를 찾은, 입구와 출구를 동시에 얻은 인간만이 지을 수 있는 자신감의 표정이었다. 나는 그런 미소를 지을 수가 없다, 라고 로미는 생각했다. 가족, 남자친구, 결혼, 직장, 옷, 화장품, 영화, 음악감상, 출근, 퇴근, 회식, 그런 것들은 출구가 되지 못한다. 내가 원하고 이룰 수 있는 한가지 일만이 출구가 되어 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런 기회를 멀찌감치 떠나 보냈다. 나는 고교졸업과 동시에 출구를 향해 떠났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극장에서 그 남자를 본 순간에라도, 출구가 없는 인간과 마주한 순간에라도 그 사실을 발견했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별 의미도 없는 것들에 중독되어 하루하루를 날려 보내며 시간을 낭비했다. 난 이제 웃을 수가 없다. 그런 웃음을 지을 자격이 없다. 내게는 출구가 없다. 그 울던 남자처럼, 하고 로미는 생각했다.

순간, 줄리엣과 로미오가 쓰러져 있던 장면이 떠올랐다. 둘은 어디로도 갈 곳이 없는 연인이었고, 하나는 약을 먹고, 하나는 총을 머리에 겨누고 떠나 버렸다. 어디로? 출구를 찾아 떠났다. 그들에게 출구는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그건 바로, 모든 것을 포기하는 일이었다. 줄리엣이 했듯, 로미오가 했듯. 그리고 탐 요크가 가르쳐 주듯 말이다. 분명 그 긴머리 남자도 그런 길을 택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출구가 오직 하나뿐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에게도 출구는 하나밖에 없다, 라고 로미는 생각했다.

로미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로미의 집은 7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로미는 CD를 뒤져 찾아낸 'Exit Music'을 크게 틀었다. 그리고, 하늘로 힘차게 날아 올랐다. 출구를 찾은 그녀의 눈에는 기쁨만이 가득했다. 그녀의 눈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녀의 모든 부분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찬란하게 빛났다. 그녀의 방에서는 탐 요크의 슬픈 목소리가 몇 분간 계속 울려퍼지고 있었다.

http://imazine.hihome.com
공감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194개(8/10페이지)
RHkorea : 자게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54 Re: 오늘 Radiohead 영국 수입판으로 이번 앨범 삽니다!!!!쫌 11500원 1654 2001.06.08 22:40
53 Re: 오늘 Radiohead 영국 수입판으로 이번 앨범 삽니다!!!!쫌 h 1745 2001.06.08 13:09
52 Re: 오늘 Radiohead 영국 수입판으로 이번 앨범 삽니다!!!!쫌 12700원 1850 2001.06.08 02:29
51 Re: 오늘 Radiohead 영국 수입판으로 이번 앨범 삽니다!!!! choiceRa 1933 2001.06.07 23:00
50 Re: I Fucking Love Radiohead~! 음.. 1805 2001.05.30 20:24
49 Re: 정말 열받는다~!!! Radiohead~!!!! . 1762 2001.05.29 00:28
48 radiohead에 관한 짧은 소식들?.. katemoss 1895 2001.05.11 19:52
47 radiohead 뮤직비디오는 어디서 볼수 있을까요? 멍청이 1815 2001.05.07 20:00
>> [래디오헤드 시리즈 마지막] Exit Music - RadioHead Beatlebum 2271 2001.04.28 23:15
45 RADIOHEAD's music.. my+love 1895 2001.04.25 14:59
44 [음악소설 2탄] Creep - Radiohead Beatlebum 2038 2001.04.21 15:25
43 radiohead부트렉...... JIN 1811 2001.04.15 23:23
42 Radiohead 영상회 짜라투스트라 1968 2001.03.30 00:14
41 radiohead+in+dream 종일군 1826 2001.03.26 15:20
40 Re: RADIOHEAD는 음울함이 딱이야. KID+A 1887 2001.03.20 15:54
39 radiohead의 명성이라... 브릿팝! 1887 2001.03.17 13:24
38 Re: Radiohead by Talking Heads . 1912 2001.03.02 11:23
37 radiohead와 oasis의 관계? mosquito 3766 2001.02.27 20:43
36 이것이 바로 RADIOHEAD thom 2082 2001.02.24 00:00
35 MNE시상식의 RADIOHEAD ~~ 2018 2001.02.13 09:57
일반 로그인
소셜 로그인
아이디/비번 기억
소셜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서 로그인하시면 별도의 로그인 절차없이 회원서비스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많이 본 글
댓글 많은 글
추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