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가 똑똑 떨어지는 절간 처마 밑에서 책을 읽었다. .. 딱 여기까지만 쓰면 그런대로 매력적인 풍경이었을텐데, 아무래도 파트너를 잘못 골랐다.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 세상에. 무슨 만화책도 아니고, 소설 하나 들여다보기 위해 비닐포장을 뜯어내기는 난생 처음이다. 욱하는 마음을 뒷편에서 지켜보고 계신 관세음보살(;;)의 자애로운 '덕'을 빌려 떨쳐내고 50여 페이지를 읽어내려간다. 책을 덮고 뒷표지의 이런저런 '찬사'들을 훑어내린 뒤, 그제서야 마침내 이어지는 감탄사 한 마디. "아하.. 신발."

그래. 무얼 염두에 두고서, 무슨 내용을 어떻게 써내려갈 것이며, 그 문장들 사이사이마다 어떤 수사와 복선들을 놓을 것인지. 그들을 통해 자신이 글로서 녹여내고자 하는 생의 통찰이란 무엇인지 - 그야 전적으로 '작가'의 재량에 달린 일이겠다만. 그 의도가 어땠든 간에 "서른을 향해 달려가는, 혹은 이미 서른 언저리에 자리잡은 쿨~한 그/녀들의 진짜 속사정"을 말못해 안달난 소설들은 이미 수요한계선을 뛰어넘어 베스트셀러 서가에까지 인플레를 일으키고 있지 않느냔 말이지.

"내 삶에 네비게이션이라도 달렸으면 싶다"며 "서른두 살. 가진 것도 없고, 이룬 것도 없다. 나를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내가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도 없다. 우울한 자유일까, 자유로운 우울일까. 나,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무엇이든?"하고 심경을 토로하는 모습. 최대한 양보해서 '순수'하게 바라보려 해도 수 번째 맞선을 헛탕친 기분도 풀겸 GQ에도 실렸을 법한 레스토랑에서 삼 만원짜리 정식을 주문하고, 명동 거리의 직판 매장에서 쇼핑을 하다 80만원짜리 프라다 폰으로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그런대로 먹고 살만은 한데 뭔가 사는데.. 낭만이라는 게 안 느껴져. 아무 의욕도 안 나고.. 몰라, 암튼 사는게 지겨워. 나 이대로 계속 살아도 될까" 하는 푸념의 이미지와 묘하게 겹쳐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김윤아식 "유리가면" 만큼이나 얕은 인식틀을 덮어두려는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정도로 '프랜차이즈화'된 인생담을 보겠다고 비닐포장에 별책부록까지 뜯어내야 했던 일, 별로 유쾌하지 못한 경험이었다.

책을 덮어 밀어두곤 전 부치는 시늉이나 부리며 쓸데 없는 투정이나 쏟아내기 시작한다. 아하하, 그럼. 미친게지. 그 와중에도 "무언가를 향해 열을 다해 빠져들 만한 대상을 못 찾겠다"는 구실 좋은 핑계는 항상 마련해둔다.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교양"같은, 간간히 들춰보기도 좋고 목침이나 흉기 대신 써도 좋을만한 녀석도 있지만, 그런 책은 어디까지나 머리 싸매고 손으로 짚어내려가며 대해야 할 대상이지 순수하게 '빠져들 만한' 대상은 못된다. 어디 요즘 읽을 만한 소설책 없나요.. ㅠ_ㅠ